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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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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회 건축은 기독교 예배를 위한 건물 및 그 건축 양식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초기에는 가정 교회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기독교 공인 이후 바실리카 양식을 차용하여 발전했다. 중세 시대에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나타났으며, 동방 교회는 비잔틴 양식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건축 문화를 형성했다. 종교 개혁 이후에는 설교 중심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이 등장했으며, 근현대에는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교회 건축은 지역, 종파,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 동아시아, 필리핀, 왈라키아, 미국, 노르웨이 등 각 지역의 고유한 특징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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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건축
개요
유형건축 분야
설명교회 건물의 설계 및 건축에 초점을 맞춘 건축 분야이다.
관련 분야건축, 기독교 미술, 종교 건축
역사적 맥락
기원초기 기독교 시대
발전다양한 문화 및 종교적 요구를 반영하여 발전함
주요 특징
일반적 특징특정 종교적 요구 사항 충족
다양한 건축 스타일과 기술을 통합함
종교적 신념과 가치를 반영
스타일
초기 기독교 건축로마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음
비잔틴 건축돔과 모자이크가 특징
로마네스크 건축튼튼한 구조와 둥근 아치
고딕 건축높은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르네상스 건축고전적 형태와 비례를 재현
바로크 건축웅장함과 화려한 장식
현대 건축다양한 스타일과 재료 사용
추가 정보
중요성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표현 수단이다.
영향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큰 영향을 미침

2. 초기 교회 건축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회당이나 '가정 교회'라고 불리는 개인 주택에서 예배를 드렸다.[1] 3세기 말, 두라-유로포스 교회와 같이 주택을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두라-유로포스 교회는 두 개의 방을 하나로 합치고 단상을 설치했으며, 작은 방은 세례당으로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불법이었기 때문에, 교회 건물은 거의 건설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회당(synagogues)과 개인 주택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분리된 후에도 가정교회(house churches)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집에서 계속 예배를 드렸다.[1] 바울 사도(Saint Paul)는 고린도전서(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에서 프리스길라와 아굴라(Aquila and Prisca)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를 언급하며 가정 교회의 존재를 시사했다.[1]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 시기에는 니코메디아에 있는 황제의 궁전 맞은편에 교회 건물이 있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시기에 파괴되었다.[2] 성경은 불태워지고 교회의 기구와 가구는 약탈당했다.

4세기 초,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기독교가 합법화되면서, 기독교 건축은 시민 및 제국 형태에 맞춰 발전했다. 크고 직사각형의 회의장인 바실리카가 예배당의 모델로 일반화되었으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산타 콘스탄차와 같은 큰 기독교 교회들이 건설되었다.[3]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1세밀비우스 다리 전투 승리(312년)와 함께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 건축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3] 이전까지 개인 주택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던 기독교 공동체는 이제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민 및 제국 형태에 맞춰 만들어진 바실리카 양식이 교회 건축의 모델로 채택되었다.[4]

바실리카는 회의, 시장, 법정 등으로 사용되던 로마의 건축 양식으로, 크고 직사각형의 회의장과 같은 구조였다.[4] 바실리카는 중앙의 신랑(nave)과 양쪽의 측랑(aisle)으로 구성되며, 때로는 갤러리와 클리어스토리도 포함되었다. 기독교 바실리카는 주교와 사제들이 제단 뒤 단상에 앉는 앱스(apse)를 한쪽 끝에 두는 것이 특징이었다.[3] 이는 이교 바실리카의 중심이 황제의 동상이었던 것과 달리, 기독교 바실리카는 성찬식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구 성 베드로 대성당 평면도. 안뜰(atrium), 현관(narthex, vestibule), 이중 통로(aisle)가 있는 중앙 신랑(nave), 성직자석(bema)이 뻗어 나가는 횡단부(transept), 그리고 반원형 후진(apse, exedra)을 보여준다.


초기 교회 건축은 가정교회, 안뜰(Atrium), 바실리카(basilica), 성직자석(bema), 능묘, 십자형 평면도 등 고대 로마 시대의 다양한 건축 특징을 계승하여 발전했다. 특히, 로마 바실리카와 로마 목욕탕의 구조는 높은 지붕을 가진 큰 둥근 천장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에 낮은 방이나 넓은 아케이드 통로로 지지되는 형태였으며, 양쪽 끝에 엑세드라 또는 압스라 불리는 반원형 공간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대성당 건축에 다양하게 적용되었다.[3]

성직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제단이 있는 작은 후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고, 회당 건축 양식에서 가져온 '베마(bema)'라고 불리는 높여진 단상이 많은 대형 바실리카 교회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St Paul's outside the Walls)의 경우, 이 베마는 측면으로 확장되어 두 개의 팔을 형성하고, 돌출된 후진을 가진 T자 모양을 이루었다. 이러한 형태는 라틴 십자가 형태로 발전하여 서양 대성당과 대형 교회의 전형적인 평면이 되었다. 십자가의 팔은 트랜셉트라고 불린다.[6]

2. 1. 가정 교회와 초기 기독교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회당이나 '가정 교회'라고 불리는 개인 주택에서 예배를 드렸다.[1] 3세기 말, 두라-유로포스 교회와 같이 주택을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두라-유로포스 교회는 두 개의 방을 하나로 합치고 단상을 설치했으며, 작은 방은 세례당으로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불법이었기 때문에, 교회 건물은 거의 건설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회당(synagogues)과 개인 주택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분리된 후에도 가정교회(house churches)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집에서 계속 예배를 드렸다.[1] 바울 사도(Saint Paul)는 고린도전서(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에서 프리스길라와 아굴라(Aquila and Prisca)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를 언급하며 가정 교회의 존재를 시사했다.[1]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의 궁전 맞은편에 있는 교회 건물과 같이 특별히 교회 집회를 위해 건설된 건물도 있었다. 이 교회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 집정 시기에 파괴되었는데, 성경은 불태워지고 교회의 기구와 가구는 약탈당했다.[2]

4세기 초,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기독교가 합법화되면서, 기독교 건축은 시민 및 제국 형태에 맞춰 발전했다. 크고 직사각형의 회의장인 바실리카가 예배당의 모델로 일반화되었으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산타 콘스탄차와 같은 큰 기독교 교회들이 건설되었다.[3]

2. 2. 바실리카 양식의 발전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1세밀비우스 다리 전투 승리(312년)와 함께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 건축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3] 이전까지 개인 주택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던 기독교 공동체는 이제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민 및 제국 형태에 맞춰 만들어진 바실리카 양식이 교회 건축의 모델로 채택되었다.[4]

바실리카는 회의, 시장, 법정 등으로 사용되던 로마의 건축 양식으로, 크고 직사각형의 회의장과 같은 구조였다.[4] 바실리카는 중앙의 신랑(nave)과 양쪽의 측랑(aisle)으로 구성되며, 때로는 갤러리와 클리어스토리도 포함되었다. 기독교 바실리카는 주교와 사제들이 제단 뒤 단상에 앉는 앱스(apse)를 한쪽 끝에 두는 것이 특징이었다.[3] 이는 이교 바실리카의 중심이 황제의 동상이었던 것과 달리, 기독교 바실리카는 성찬식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 건축은 가정교회, 안뜰(Atrium), 바실리카(basilica), 성직자석(bema), 능묘, 십자형 평면도 등 고대 로마 시대의 다양한 건축 특징을 계승하여 발전했다. 특히, 로마 바실리카와 로마 목욕탕의 구조는 높은 지붕을 가진 큰 둥근 천장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에 낮은 방이나 넓은 아케이드 통로로 지지되는 형태였으며, 양쪽 끝에 엑세드라 또는 압스라 불리는 반원형 공간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대성당 건축에 다양하게 적용되었다.[3]

성직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제단이 있는 작은 후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고, 회당 건축 양식에서 가져온 '베마(bema)'라고 불리는 높여진 단상이 많은 대형 바실리카 교회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St Paul's outside the Walls)의 경우, 이 베마는 측면으로 확장되어 두 개의 팔을 형성하고, 돌출된 후진을 가진 T자 모양을 이루었다. 이러한 형태는 라틴 십자가 형태로 발전하여 서양 대성당과 대형 교회의 전형적인 평면이 되었다. 십자가의 팔은 트랜셉트라고 불린다.[6]

3. 중세 교회 건축

예배 참여가 감소하면서 현관 교회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교회가 점점 더 성직자 중심으로 변화함에 따라 교회 건물도 변화했다. 유럽에서는 '두 개의 방'으로 된 교회가 표준이 되었다. 첫 번째 방인 신랑(nave)은 회중이 사용했고, 두 번째 방인 성소(sanctuary)는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곳이었으며 미사가 거행되는 곳이었다. 회중은 방 사이의 아치를 통해서만 미사를 멀리서 볼 수 있었는데(후기 중세 시대에는 나무 칸막이인 루드 스크린으로 막혀 있었다.), 성체(성찬의 빵)의 거양이 예배의 초점이 되었다. 당시에는 회중이 일반적으로 성체를 받아먹지 않았다. 미사가 라틴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회중은 그때까지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 행위에 만족했다. 시야 확보가 어려워서 일부 교회에는 벽과 칸막이에 전략적으로 구멍인 '스퀸트(squints)'를 내어 신랑에서 성체 거양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모든 사제는 매일 미사를 드려야 하고 제단은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는 두 가지 원칙 때문에, 수도원 교회 내에서는 적어도 여러 개의 제단이 필요했고 그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예배의 변화 외에도 교회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은 새로운 재료의 사용과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었다. 북유럽에서는 초기 교회가 종종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0세기와 11세기에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이 돌을 더 많이 사용하면서 더 큰 구조물이 세워졌다.

특히 수도원이나 대성당과 같은 두 개의 방으로 된 교회에는 트랜셉트가 추가될 수 있었다. 트랜셉트는 건물의 평면도를 구성하는 팔과 같은 부분이였다. 건물은 그 용도를 더 명확하게 상징하게 되었다. 때때로 교회의 중심 초점이 된 이 교차 지점에는 서쪽 끝 탑 외에도, 또는 대신에 자체 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엘리 대성당과 같이 이러한 불안정한 구조물은 무너지는 경우가 있었고 재건해야 했다.) 이제 수도사 또는 대수도회 사제들의 사무실 찬송을 위한 성소는 더 길어졌고 칸막이로 신랑과 분리된 성가대석이 되었다. 발전 과정에서 실용적인 기능과 상징성이 모두 작용했다.

샤르트르 대성당(Notre-Dame de Chartres) 서쪽 정면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서쪽 정면

3. 1. 로마네스크 양식

10세기와 11세기에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이 돌을 더 많이 사용하면서 더 큰 교회 구조물이 세워졌다.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서유럽에서 유행한 로마네스크 양식은 두꺼운 벽과 둥근 아치, 작은 창문이 특징이며,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로는 독일의 힐데스하임 성 미카엘 교회가 있다. 예배 참여가 감소하고 교회가 성직자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교회 건물은 신랑(nave)과 성소(sanctuary)의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는 것이 표준이 되었다. 수도원이나 대성당과 같은 교회에는 트랜셉트가 추가될 수 있었고, 건물의 중심 초점이 된 교차 지점에는 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3. 2. 고딕 양식

핀란드 코트카의 신고딕 양식 코트카 교회 야경


고딕 양식 건축은 12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16세기까지 유럽 전역에 확산된 교회 건축 양식이다. 곡선, 아치,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를 강조하며, 뾰족한 아치, 리브 볼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이 주요 특징이다.[33][34] 이러한 구조물들은 웅장함을 통해 신의 위엄을 반영하고자 하였으며, 정교한 수학과 공학 기술이 적용되었다.[33]

고딕 양식 교회는 예술 작품과 조화를 이루었는데,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채색된 빛을 통해 천상의 분위기를 연출했다.[36] 조각 또한 중요한 예술 양식으로, 복잡한 곡선과 형태를 사용하여 인물을 묘사했다.[37]

고딕 양식은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으며, 프랑스 북동부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33] 13세기에 시작된 광채 양식(Rayonnant style)은 과장된 기하학적 특징으로 대표된다.[35] 고딕 양식은 교회뿐만 아니라 주택, 길드 홀, 공공 건물 등 다양한 건축물에 영향을 미쳤다.

샤르트르 대성당, 노트르담 드 파리, 쾰른 대성당 등이 대표적인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영국에서는 흑사병 이후 '수직 양식'이 발전하여 장식이 더욱 화려해졌다.[14]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초기 양식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며,[14] 헨리 7세 예배당과 킹스 칼리지 예배당에서는 팬 볼트(fan vaulting)를 볼 수 있다.[14]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4. 동방 교회 건축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동방 기독교서방 기독교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대 분열로 이어졌다. 동방 교회는 비잔틴 제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건축 양식을 발전시켰다.

== 비잔틴 양식 ==

동방 기독교는 중앙 집중식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들은 원래 순교자들의 무덤을 보관하는 묘소인 ''마르티리아(martyria)''로 건설되었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묘당은 모자이크 장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중요한 생존 사례이다.

이 건물들은 이교도 무덤을 본떠 정사각형, 십자형, 다각형 등으로 지어졌으며, 돔으로 지붕을 덮어 하늘을 상징했다. 비잔틴 교회는 돔 공간을 중심으로 계획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반원형 제단 쪽으로 명확한 축을 유지했다. 이 돌출부는 성상이 걸리는 성상화를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9세기 돈골라의 콥트식 십자형 교회


6세기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건축은 중앙 집중식과 바실리카식 설계를 결합한 교회를 만들어냈는데, 성 소피아 대성당(현재는 모스크)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후대의 기독교와 이슬람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앙 집중식 교회의 변형된 형태는 러시아에서 개발되어 16세기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이 텐트식 교회의 좋은 예이다.

정교회 교회의 전통적인 내부 모습


== 동방 정교회 건축 ==

동방 기독교서방 기독교는 초기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방에서는 보다 밀집된 중앙 집중식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들은 원래 순교자들의 무덤을 보관하는 묘소인 ''마르티리아(martyria)''로 건설되었다. 6세기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건축은 중앙 집중식과 바실리카식 설계를 효과적으로 결합한 교회를 만들어냈는데, 축을 이루는 반원형 돔과 양쪽에 아케이드 회랑이 있었다. 성 소피아 대성당(현재는 모스크) 교회는 가장 중요한 사례였으며, 예루살렘의 돔 오브 더 록과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대모스크와 같은 후대의 기독교와 이슬람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동방 정교회 대성당과 큰 교회들은 십자형 평면도를 가지고 있다. 신랑, 제대, 횡랑의 길이가 같아 그리스 십자형을 이루는 정사각형 평면도로, 교차점은 일반적으로 돔으로 덮여 있는 형태는 동방 정교회에서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비잔틴 교회는 돔 공간을 중심으로 계획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반원형 제단 쪽으로 명확한 축을 유지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다른 반원형 제단보다 더 멀리 확장되었다. 이 돌출부는 성상이 걸리는 성상화를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중앙 집중식 교회의 변형된 형태는 러시아에서 개발되어 16세기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여기서 돔은 훨씬 더 가늘고 키가 큰 사당형 또는 원추형 지붕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텐트식 교회의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이다.

4. 1. 비잔틴 양식

동방 기독교서방 기독교는 초기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동방에서는 중앙 집중식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들은 원래 순교자들의 무덤을 보관하는 묘소인 ''마르티리아(martyria)''로 건설되었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묘당은 모자이크 장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중요한 생존 사례이다.

이 건물들은 이교도 무덤을 본떠 정사각형, 십자형, 다각형 등으로 지어졌으며, 돔으로 지붕을 덮어 하늘을 상징했다. 비잔틴 교회는 돔 공간을 중심으로 계획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반원형 제단 쪽으로 명확한 축을 유지했다. 이 돌출부는 성상이 걸리는 성상화를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6세기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건축은 중앙 집중식과 바실리카식 설계를 결합한 교회를 만들어냈는데, 성 소피아 대성당(현재는 모스크)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후대의 기독교와 이슬람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앙 집중식 교회의 변형된 형태는 러시아에서 개발되어 16세기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이 텐트식 교회의 좋은 예이다.

4. 2. 동방 정교회 건축

동방 기독교서방 기독교는 초기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방에서는 보다 밀집된 중앙 집중식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들은 원래 순교자들의 무덤을 보관하는 묘소인 ''마르티리아(martyria)''로 건설되었다. 6세기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건축은 중앙 집중식과 바실리카식 설계를 효과적으로 결합한 교회를 만들어냈는데, 축을 이루는 반원형 돔과 양쪽에 아케이드 회랑이 있었다. 성 소피아 대성당(현재는 모스크) 교회는 가장 중요한 사례였으며, 예루살렘의 돔 오브 더 록과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대모스크와 같은 후대의 기독교와 이슬람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동방 정교회 대성당과 큰 교회들은 십자형 평면도를 가지고 있다. 신랑, 제대, 횡랑의 길이가 같아 그리스 십자형을 이루는 정사각형 평면도로, 교차점은 일반적으로 돔으로 덮여 있는 형태는 동방 정교회에서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비잔틴 교회는 돔 공간을 중심으로 계획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반원형 제단 쪽으로 명확한 축을 유지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다른 반원형 제단보다 더 멀리 확장되었다. 이 돌출부는 성상이 걸리는 성상화를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중앙 집중식 교회의 변형된 형태는 러시아에서 개발되어 16세기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여기서 돔은 훨씬 더 가늘고 키가 큰 사당형 또는 원추형 지붕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텐트식 교회의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이다.

5. 종교 개혁과 교회 건축의 변화

종교 개혁은 교회 건축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이상에 따르면, 설교, 즉 말씀은 교회 예배의 중심 행위가 되어야 했다.[38] 이는 설교단이 교회 내부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목사의 말을 듣고 볼 수 있도록 교회를 설계해야 함을 의미했다.[38] 종교 개혁 시대에는 "완전하고 적극적인 참여"가 강조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초점은 사제적 강조보다는 말씀의 전파에 있었으며, 성찬식 테이블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히 한 번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회중에게 더 가까이 배치되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개혁된 후 장식이 바뀌었고,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이 제거되었다.[38]

최초로 새롭게 건설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1543년 노이부르크 성의 예배당이었고, 그 뒤를 이어 토르가우의 하르텐펠스 성 예배당이 1544년 10월 5일 마르틴 루터에 의해 봉헌되었다.

1590년에 건립된 독일 빌헬름스부르크 성의 예배당
1590년에 건립된 독일 빌헬름스부르크 성의 예배당[39]과 같이, 이미지와 조각상은 때때로 무질서한 공격과 비공식적인 폭도 행위로 제거되었다. 1524년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와 같이 중세 교회는 장식물을 벗겨졌는데, 이는 1535년 제네바의 본 교회인 생피에르 대성당을 시작으로 칼뱅파 종교 개혁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조약에서 독일어권 국가의 통치자들과 합스부르크 황제인 카를 5세는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지오"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는데, 이는 통치자의 종교가 통치받는 자들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607년 북브라반트 빌럼스타트에 네덜란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물이 세워졌는데, 설교에 초점을 맞춘 칼뱅주의에 따라 돔이 있는 팔각형 모양의 교회였다.[39] 암스테르담의 웨스터커크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1620년에서 1631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를 위해 건설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교회로 남아 있다.

17세기 초,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대다수 국민이 프로테스탄트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황제에 의해 반종교개혁이 촉발되어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합스부르크는 실레시아 지방에 세 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허용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세 교회가 도시 외부에 위치하고 교회로 인식될 수 없도록 목조 건물로 헛간이나 주택처럼 보이게 하고 탑이나 종탑을 설치할 수 없도록 명령했다.[39]
1726년에 지어진 슬로바키아 흐론섹의 프로테스탄트 목조 교회


17세기와 18세기 영국에서는 영국 국왕의 교회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상징하기 위해 앵글리칸 교회에서 왕실 문장을 그림이나 부조 형태로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40]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바로크 양식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건설되었지만, 의식적으로 장식이 더 단순했다.
자르브뤼켄의 루트비히키르헤 내부


트란셉트가 본당이 되고 네이브가 생략되는 등 새로운 그리고 진정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인 배열로 일부 교회가 건설되었다. 18세기 동안 많은 독일 루터 교회에서 제단과 세례반, 설교단, 오르간을 수직 축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내부 디자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제단 위 중앙 그림은 설교단으로 대체되었다.

19세기 초 신루터교는 이러한 계획이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독일 복음주의 교회 회의는 1861년 교회 건축에 고딕 양식을 권장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관련하여, 고딕 부흥 건축은 역사주의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다시 성찬식을 설교보다 우위에 두는 새로운 신학 프로그램의 표현이기도 했다. 20년 후 자유주의 루터교도와 칼뱅주의자들은 예배 요구 사항을 기반으로 고안된 새로운 진정한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을 원했다. 링키르헤(비스바덴)는 1892년에서 1894년에 이러한 이념에 따라 건설된 최초의 교회였다.

5. 1.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

종교 개혁은 교회 건축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이상에 따르면, 설교, 즉 말씀은 교회 예배의 중심 행위가 되어야 했다.[38] 이는 설교단이 교회 내부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목사의 말을 듣고 볼 수 있도록 교회를 설계해야 함을 의미했다.[38] 종교 개혁 시대에는 "완전하고 적극적인 참여"가 강조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초점은 사제적 강조보다는 말씀의 전파에 있었으며, 성찬식 테이블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히 한 번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회중에게 더 가까이 배치되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개혁된 후 장식이 바뀌었고,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이 제거되었다.[38]

최초로 새롭게 건설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1543년 노이부르크 성의 예배당이었고, 그 뒤를 이어 토르가우의 하르텐펠스 성 예배당이 1544년 10월 5일 마르틴 루터에 의해 봉헌되었다. 1590년에 건립된 독일 빌헬름스부르크 성의 예배당[39]과 같이, 이미지와 조각상은 때때로 무질서한 공격과 비공식적인 폭도 행위로 제거되었다. 1524년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와 같이 중세 교회는 장식물을 벗겨졌는데, 이는 1535년 제네바의 본 교회인 생피에르 대성당을 시작으로 칼뱅파 종교 개혁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조약에서 독일어권 국가의 통치자들과 합스부르크 황제인 카를 5세는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지오"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는데, 이는 통치자의 종교가 통치받는 자들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607년 북브라반트 빌럼스타트에 네덜란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물이 세워졌는데, 설교에 초점을 맞춘 칼뱅주의에 따라 돔이 있는 팔각형 모양의 교회였다.[39] 암스테르담의 웨스터커크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1620년에서 1631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를 위해 건설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교회로 남아 있다.

17세기 초,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대다수 국민이 프로테스탄트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황제에 의해 반종교개혁이 촉발되어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합스부르크는 실레시아 지방에 세 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허용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세 교회가 도시 외부에 위치하고 교회로 인식될 수 없도록 목조 건물로 헛간이나 주택처럼 보이게 하고 탑이나 종탑을 설치할 수 없도록 명령했다.[39]

17세기와 18세기 영국에서는 영국 국왕의 교회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상징하기 위해 앵글리칸 교회에서 왕실 문장을 그림이나 부조 형태로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40]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바로크 양식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건설되었지만, 의식적으로 장식이 더 단순했다.

트란셉트가 본당이 되고 네이브가 생략되는 등 새로운 그리고 진정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인 배열로 일부 교회가 건설되었다. 18세기 동안 많은 독일 루터 교회에서 제단과 세례반, 설교단, 오르간을 수직 축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내부 디자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제단 위 중앙 그림은 설교단으로 대체되었다.

19세기 초 신루터교는 이러한 계획이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독일 복음주의 교회 회의는 1861년 교회 건축에 고딕 양식을 권장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관련하여, 고딕 부흥 건축은 역사주의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다시 성찬식을 설교보다 우위에 두는 새로운 신학 프로그램의 표현이기도 했다. 20년 후 자유주의 루터교도와 칼뱅주의자들은 예배 요구 사항을 기반으로 고안된 새로운 진정한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을 원했다. 링키르헤(비스바덴)는 1892년에서 1894년에 이러한 이념에 따라 건설된 최초의 교회였다.

6. 근현대 교회 건축

6. 1. 다양한 양식의 혼재

6. 2.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전례 운동에서 비롯된 예배의 공동체적 성격과 회중 참여의 중요성은 교회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41][42] 이는 단순한 단일 공간 평면 계획으로 나타났으며,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사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주요 발전이 이루어졌다. 오귀스트 페레가 설계한 파리 근교 르랭시의 교회는 철근 콘크리트와 같은 재료와 평면 계획에서 기존 교회 건축의 틀을 벗어난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루돌프 슈바르츠가 개조한 독일의 슐로스 로텐펠스암마인은 견고한 흰색 벽, 깊은 창문, 돌 포장을 갖춘 큰 직사각형 공간으로, 장식 없이 100개의 이동식 의자만을 배치하여 예배를 위한 제단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삼면에서 둘러싸는 구조였다. 이는 이후 미국을 포함한 유럽 교회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슈바르츠의 첫 번째 본당 교회인 아헨의 성체 성당은 바우하우스 운동의 영향을 받은 단순함을 보여준다.[43] 정육면체 평면의 외부에 흰색 벽과 무색 창문, 제단이 있는 좁은 직사각형 ''랑바우''를 특징으로 한다. 슈바르츠는 이를 '그리스도 중심적'이 아닌 '유일신 중심적'이라고 설명했다. 제단 앞에는 벤치가 놓였고, 뒤에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영역을 상징하는 흰색 공백의 벽이 있었다. 이러한 단순함은 프리츠 메츠거와 도미니쿠스 뵘과 같은 건축가들을 통해 스위스로 확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메츠거는 바젤리헨의 성 프란시스쿠스 교회에서 자신의 건축 철학을 발전시켰다.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노트르담 뒤 오(1954년)도 주목할 만한 건물이다.[44] 미국에서는 시카고 근교 리슬의 성 프로코피우스 로마 가톨릭 수도원 교회(1971년)에서 단순성과 연속성을 추구하는 유사한 경향이 나타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크로산크툼 콘실리움 법령(1963년)은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장려하며, 새로운 교회 건축에 반영될 것을 요구했다.[41][42] 이후 사제가 백성을 향하는 독립형 제단의 사용이 장려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 가톨릭 대주교인 리버풀브라질리아의 원형 건물과 독립형 제단을 가진 대성당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재정 부족과 '시장' 신학은 세속 행사와 신성한 행사가 같은 공간에서 열리는 다목적 교회 건축을 이끌었다. 전례 행위의 통합 강조는 세례, 말씀 전례, 성찬 거행을 위한 공간 분리 제안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리처드 자일스에 의해 영국과 미국에서 제안되었다. 대규모 회중을 위해 미국 시카고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와 같은 거대한 원형극장 형태가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의 획일성에 대한 반발로, 역사적 양식과 기독교 건축의 "문화적 기억"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스티븐 슐뢰더(Dr. Steven Schloeder), 던컨 스트로이크(Duncan Stroik), 토마스 고든 스미스가 대표적인 건축가이다. 기능적이고 형식화된 모더니즘 운동의 형태와 공간은 다양한 미학으로 대체되었고, 건축가들은 모더니즘에서 간과되었던 건축 요소와 형태의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가치를 재발견했다. 나이지리아의 교회 건물은 이전의 외국 기념물 같은 모습에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변화하여 공장처럼 보이게 되었다.[45]

7. 지역별 교회 건축

교회 건축은 종파뿐만 아니라 지리적 위치와 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 따라 다양하다. 전형적인 교회 건축 양식과는 다른 점과 독특한 특징은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 모자이크가 두드러지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알제의 성심 대성당, 알제 (1963)


유럽 전역에서 교회 건축이 발전하고 개별 교회가 설계 및 건설되는 과정은 지역마다 달랐으며, 때로는 같은 지역 내, 같은 역사적 시대 내에서도 교회마다 달랐다.

교회의 설계 및 건설 방식을 결정한 요인들 중에는 지역 사회의 성격, 도시, 마을 또는 농촌의 위치, 수도원 교회인지 여부, 대학 교회인지 여부, 주교의 후원을 받았는지 여부, 부유한 가문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는지 여부, 순례를 유도할 가능성이 있는 성인의 유물이나 다른 성물을 포함하고 있는지 여부 등이 있다.

대학 교회와 수도원 교회는, 작은 종교 공동체를 위한 것이더라도, 일반적으로 같은 지역에 있고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본당 교회보다 더 복잡한 형태를 보여준다.

주교의 후원을 받아 건설된 교회는 일반적으로 유능한 교회 건축가를 고용했으며, 설계에서 본당 건축가와는 다른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준다.

많은 본당 교회는 부유한 지역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 이것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는 크게 다를 수 있다. 특정 후원자에 의해 건물 전체의 설계 및 건설이 자금 조달되고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반면에 후원의 증거는 제단 예배당, 묘소, 기념물, 설비, 스테인드글라스 및 기타 장식의 증가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유명한 유물이나 숭배의 대상을 포함하고 순례 교회가 된 교회는 종종 매우 크며 바실리카의 지위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교회들은 특정 성인의 유해를 모시거나 특정 성인의 삶과 관련이 있지만, 지속적인 순례와 그것이 가져다준 재정적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성인의 인기, 그들의 유물에 대한 숭배, 그리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교회의 규모와 중요성은 일관성이 없으며 완전히 다른 요인에 의존할 수 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전사 성인인 산 조반니와 산 파올로는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같은 시기에 프란체스코회가 프라리 교회를 건설하는 것과 경쟁하여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인 교회를 건설하여 기리고 있다.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숭배되고 수많은 지역의 수호 성인인 순교자 성 루치아의 유해를 모셨던 훨씬 작은 교회는 19세기 후반 베네치아의 기차역을 건설하기 위해 철거되었다.

진정으로 바로크 양식의 첫 번째 파사드는 1568년에서 1584년 사이에 로마에 있는 예수회(예수회)의 모교회인 예수 성당을 위해 건설되었다. 이것은 바로크 양식을 건축에 도입했다. 반종교개혁의 선봉장으로서 예수회의 신학적 과제에 부응하여, 새로운 스타일은 곧 가톨릭 교회 건축의 승리적인 특징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노르웨이 교회 건설에는 콘크리트와 금속 패널과 같은 현대적인 자재와 기술이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보도 대성당은 철근 콘크리트로 건설되어 넓은 바실리카를 건설할 수 있었다. 1960년대에는 경량 콘크리트로 건설되고 알루미늄 외장으로 덮인 북극 대성당과 같이 전통에서 더욱 두드러진 탈피가 있었다.

;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의 교회 건축은 초기 기독교 전통과 독자적인 건축 기술이 결합된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의 전통 건축 양식은 동방 기독교, 특히 시리아 교회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거쳤다.[18] 초기 교회들은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는데, 데브레 다모(Debre Damo) 교회는 재사용된 단일석 기둥으로 구분된 네 개의 경간으로 이루어진 신랑, 서쪽 끝의 낮은 지붕 현관(narthex), 동쪽의 성소(maqdas)로 구성되어 있다.[18]

라리벨라의 암굴 교회 중 하나인 베테 기요르기스(Bete Giyorgis) 전경.


1천년 후반부터 16세기까지는 전통 재료로 지어진 건축물과 암굴 건축물이 모두 나타난다. 엠레하나 크리스토스(Yemrehana Krestos) 교회는 데브레 다모 교회와 유사한 평면과 건축 방식을 보인다.[20] 이 시기에는 수많은 단일석 교회들이 등장하는데, 아브레하 웨 아츠베하(Abreha we Atsbeha)는 산 측면에 조각된 예배당으로, 신랑과 횡랑이 십자형 윤곽을 형성하여 정방형 십자 교회의 예로 분류된다. 라리벨라(Lalibela)의 교회들은 붉은색 응회암 언덕을 파내어 만들었는데, 비테 아마누엘(Biete Amanuel)과 십자형 베테 기요르기스(Bete Giyorgis)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서 있고, 비테 가브리엘-루파엘(Biete Gabriel-Rufael)과 비테 아바 리바노스(Biete Abba Libanos)는 한두 면만 암석에서 분리되어 있다. 이 교회들은 모두 터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21]

에리트레아 아스마라(Asmara)에 있는 엔다 마리아 대성당(Enda Mariam Cathedral)


현재까지 이어지는 에티오피아 교회 건축의 마지막 시기는 원뿔형 지붕을 가진 원형 교회를 특징으로 한다. 이 교회들은 에티오피아 고지대 주민들의 일반 주택과 유사하지만, 내부는 성소(maqdas), 기디스트(qiddist), 케네 멜레트(qene mehlet)의 3부분으로 구분된다.[22]

;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중국, 베트남,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전통 건축 양식을 교회 건축에 접목하여 독특한 형태를 창조했다.[23][24] 특히 베트남 북부에는 수백 개의 목조 교회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건설되어 뛰어난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보여준다.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에는 새로운 중국-기독교 교회 건축 양식이 등장했다.[25][26]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성심 교회, 간주란, 태국의 방콕 성구속 교회 등 전통 건축 양식을 통합한 사례를 볼 수 있다.

대만은 17세기 스페인의 산토 도밍고 요새에 인접한 교회가 있었고, 타이난의 네덜란드 제르란디아 성에도 예배당이 있었다. 현대 건축에서는 시린(타이페이)에 있는 굿 셰퍼드 교회가 전통적인 사합원 양식으로 건설되었고, 대만 신학대학 예배당에는 탑 모양과 전통적인 기와 지붕이 있다. 중산과 진난 장로교회는 일본 시대(1895~1945)에 지어져 일본 미학을 반영하며, 루스 기념 예배당은 현대적이고 문맥화된 스타일의 예로 여겨진다.[27]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15세기 후반~19세기 후반)에 스페인, 오스트로네시아, 중국 건축 아이디어가 융합된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28][29] 이는 동티모르와 함께 극동에서 유일한 기독교 다수 국가이다. 열대 기후와 지진이 잦은 환경에 적응하며 3세기에 걸쳐 발전한 ''아르키텍투라 메스티자''는 원주민 오스트로네시아 틀, 스페인인이 도입한 석조 건축, 스페인인과 중국 건축가가 통합한 장식이라는 건축 원리를 가진 ''바하이 나 바토'' 전통으로 지어졌다.[30][29][31] 초기 교회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전통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요새와 같은 두꺼운 벽과 부벽, 낮고 원통형, 직사각형 또는 팔각형의 종탑, 지역 모티브, 아시아 수호 사자를 그로테스크로 특징으로 하는 필리핀 바로크 또는 지진 바로크 양식을 만들어냈다. 이후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은 건축가가 도착하면서 신고전주의, 신고딕, 신로마네스크와 같은 새로운 스타일을 통합하며 더욱 세련되어졌다.[32]

; 왈라키아 (루마니아)

왈라키아 지역의 초기 교회 건축 양식은 서구의 고딕 및 로마네스크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았다.[15] 초기 서구 양식의 예로는 컴펄룽(Câmpulung)의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와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Drobeta-Turnu Severin)의 고딕 양식 교회 유적이 있다.[15]

쿠르테아데알제슈 대성당(Curtea de Argeș Cathedral)


비잔틴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는 쿠르테아데알제슈의 성 니콜라 교회와 도므네아스카 교회, 불가리아 니코폴리스의 교회가 있다.[15] 이 교회들은 성소, 직사각형 본당, 원형 내부와 비원형 외부, 작은 예배당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15] 니코폴리스 교회와 도므네아스카 교회는 모두 그리스식 평면도를 가지고 있지만, 도므네아스카 교회가 더 발전된 형태이다. 세르비아,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영향도 나타난다.[15]

; 미국

미국은 다양한 이민자 집단의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반영하여 다채로운 교회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건축 양식 차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네아폴리스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인 성 콘스탄틴과 폴란드 대성당 양식(Polish Cathedral style) 교회, 그리고 전국에 걸쳐 있는 러시아 정교회 교회 등이 그 예이다.[16] 많은 교회에서 큰 돔 천장, 광범위한 석조 공사, 그리고 벽 등에 종교적 성화를 위한 공간을 최대화하는 등 비잔틴 건축(Byzantine architecture)에서 영감을 받은 건축의 잔재를 볼 수 있다.[16] 우크라이나 또는 가톨릭으로 분류되는 교회들은 장식이 단순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보다 전반적으로 훨씬 정교하게 장식되고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16]

워싱턴 국립 대성당 (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은 워싱턴 D.C. 노스웨스트(Northwest, Washington, D.C.)에 위치한다.


텍사스의 경우 특히 영국계 미국인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건축 양식 자체에 나타난다.[17] 텍사스 자체가 종교적으로 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교회 건축은 다른 지역보다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남부 전쟁 이전 시대(Antebellum period)(1835~1861년)의 교회 건축은 건축가들의 가치관과 신념을 보여주는 동시에 텍사스 문화사를 보여준다.[17]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건물 모두 건축 전통, 경제적 상황, 종교적 규정,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의 미적 취향을 보여준다.[17] 이 시대의 민족 분리 운동 또한 이러한 건축의 기초에 나타난다. 그러나 각 지역의 교회는 고유한 지역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다양한 종교 집단으로 인해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물리적 외관은 지역마다 크게 다르다.[17]

미국 남서부, 특히 캘리포니아 해안 지역의 많은 가톨릭 교회들은 캘리포니아 스페인 선교지(Spanish missions in California)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미션 리바이벌 건축(Mission Revival architecture) 양식의 외관 요소를 사용하여 건축되었지만, 종종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더 현대적인 내부 요소가 추가되었다.

; 노르웨이

노르웨이에서는 특히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목재가 선호되는 건축 자재였으며, 이는 교회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7] 중세 시대 노르웨이의 모든 목조 교회는 주심 교회 기법으로 건설되었지만, 석조 건축물은 271개에 불과했다.[8] 종교 개혁 이후 새로운 교회 건축이 재개되었을 때 목재는 여전히 주요 건축 자재였지만 통나무 기법이 주류가 되었다.[9]

보르군드 주심 교회(Borgund stave church), 노르웨이, 12세기 후반


구 올덴 교회(Old Olden Church), 1759년 목조 건물


통나무 건축은 가볍고 종종 높은 주심 교회와 비교하여 더 낮고 견고한 건축 양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통나무 건축은 특히 높은 창문으로 잘라낸 경우 길고 높은 벽에는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졌다. 횡단부(트랜셉트)를 추가하면 통나무 기법의 안정성이 향상되었으며, 1700년대에 십자형 평면도가 널리 사용된 이유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구 올덴 교회(1759년)는 허리케인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건물을 대체한 것으로, 1759년 교회는 가장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십자형 모양으로 건설되었다.[10]

통나무의 길이는 벽의 길이를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11] 예를 들어 삼낭에르 교회(Samnanger church)의 경우, 통나무를 이어 붙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외각 모서리가 잘려져 직사각형이 아닌 팔각형 평면도가 되었다.[12] 십자형 건축물은 더욱 견고한 구조와 더 큰 교회를 제공했지만, 횡단부의 좌석을 위한 내부 모서리 때문에 강단과 제단의 시야가 가려졌다. 팔각형 평면도는 뛰어난 시야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넓은 신랑(네이브)을 건설할 수 있도록 견고한 구조를 제공한다. 하콘 크리스티(Håkon Christie)는 이것이 1700년대에 팔각형 교회 설계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라고 생각한다.[9]

7. 1.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의 교회 건축은 초기 기독교 전통과 독자적인 건축 기술이 결합된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7. 2.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의 전통 건축 양식은 동방 기독교, 특히 시리아 교회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거쳤다.[18] 초기 교회들은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는데, 데브레 다모(Debre Damo) 교회는 재사용된 단일석 기둥으로 구분된 네 개의 경간으로 이루어진 신랑, 서쪽 끝의 낮은 지붕 현관(narthex), 동쪽의 성소(maqdas)로 구성되어 있다.[18]

1천년 후반부터 16세기까지는 전통 재료로 지어진 건축물과 암굴 건축물이 모두 나타난다. 엠레하나 크리스토스(Yemrehana Krestos) 교회는 데브레 다모 교회와 유사한 평면과 건축 방식을 보인다.[20] 이 시기에는 수많은 단일석 교회들이 등장하는데, 아브레하 웨 아츠베하(Abreha we Atsbeha)는 산 측면에 조각된 예배당으로, 신랑과 횡랑이 십자형 윤곽을 형성하여 정방형 십자 교회의 예로 분류된다. 라리벨라(Lalibela)의 교회들은 붉은색 응회암 언덕을 파내어 만들었는데, 비테 아마누엘(Biete Amanuel)과 십자형 베테 기요르기스(Bete Giyorgis)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서 있고, 비테 가브리엘-루파엘(Biete Gabriel-Rufael)과 비테 아바 리바노스(Biete Abba Libanos)는 한두 면만 암석에서 분리되어 있다. 이 교회들은 모두 터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21]

현재까지 이어지는 에티오피아 교회 건축의 마지막 시기는 원뿔형 지붕을 가진 원형 교회를 특징으로 한다. 이 교회들은 에티오피아 고지대 주민들의 일반 주택과 유사하지만, 내부는 성소(maqdas), 기디스트(qiddist), 케네 멜레트(qene mehlet)의 3부분으로 구분된다.[22]

7. 3.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중국, 베트남,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전통 건축 양식을 교회 건축에 접목하여 독특한 형태를 창조했다.[23][24] 특히 베트남 북부에는 수백 개의 목조 교회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건설되어 뛰어난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보여준다.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에는 새로운 중국-기독교 교회 건축 양식이 등장했다.[25][26]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성심 교회, 간주란, 태국의 방콕 성구속 교회 등 전통 건축 양식을 통합한 사례를 볼 수 있다.

대만은 17세기 스페인의 산토 도밍고 요새에 인접한 교회가 있었고, 타이난의 네덜란드 제르란디아 성에도 예배당이 있었다. 현대 건축에서는 시린(타이페이)에 있는 굿 셰퍼드 교회가 전통적인 사합원 양식으로 건설되었고, 대만 신학대학 예배당에는 탑 모양과 전통적인 기와 지붕이 있다. 중산과 진난 장로교회는 일본 시대(1895~1945)에 지어져 일본 미학을 반영하며, 루스 기념 예배당은 현대적이고 문맥화된 스타일의 예로 여겨진다.[27]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15세기 후반~19세기 후반)에 스페인, 오스트로네시아, 중국 건축 아이디어가 융합된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28][29] 이는 동티모르와 함께 극동에서 유일한 기독교 다수 국가이다. 열대 기후와 지진이 잦은 환경에 적응하며 3세기에 걸쳐 발전한 ''아르키텍투라 메스티자''는 원주민 오스트로네시아 틀, 스페인인이 도입한 석조 건축, 스페인인과 중국 건축가가 통합한 장식이라는 건축 원리를 가진 ''바하이 나 바토'' 전통으로 지어졌다.[30][29][31] 초기 교회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전통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요새와 같은 두꺼운 벽과 부벽, 낮고 원통형, 직사각형 또는 팔각형의 종탑, 지역 모티브, 아시아 수호 사자를 그로테스크로 특징으로 하는 필리핀 바로크 또는 지진 바로크 양식을 만들어냈다. 이후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은 건축가가 도착하면서 신고전주의, 신고딕, 신로마네스크와 같은 새로운 스타일을 통합하며 더욱 세련되어졌다.[32]

7. 4. 왈라키아 (루마니아)

왈라키아 지역의 초기 교회 건축 양식은 서구의 고딕 및 로마네스크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았다.[15] 초기 서구 양식의 예로는 컴펄룽(Câmpulung)의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와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Drobeta-Turnu Severin)의 고딕 양식 교회 유적이 있다.[15]

비잔틴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는 쿠르테아데알제슈의 성 니콜라 교회와 도므네아스카 교회, 불가리아 니코폴리스의 교회가 있다.[15] 이 교회들은 성소, 직사각형 본당, 원형 내부와 비원형 외부, 작은 예배당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15] 니코폴리스 교회와 도므네아스카 교회는 모두 그리스식 평면도를 가지고 있지만, 도므네아스카 교회가 더 발전된 형태이다. 세르비아,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영향도 나타난다.[15]

7. 5. 미국

미국은 다양한 이민자 집단의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반영하여 다채로운 교회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건축 양식 차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네아폴리스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인 성 콘스탄틴과 폴란드 대성당 양식(Polish Cathedral style) 교회, 그리고 전국에 걸쳐 있는 러시아 정교회 교회 등이 그 예이다.[16] 많은 교회에서 큰 돔 천장, 광범위한 석조 공사, 그리고 벽 등에 종교적 성화를 위한 공간을 최대화하는 등 비잔틴 건축(Byzantine architecture)에서 영감을 받은 건축의 잔재를 볼 수 있다.[16] 우크라이나 또는 가톨릭으로 분류되는 교회들은 장식이 단순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보다 전반적으로 훨씬 정교하게 장식되고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16]

텍사스의 경우 특히 영국계 미국인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건축 양식 자체에 나타난다.[17] 텍사스 자체가 종교적으로 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교회 건축은 다른 지역보다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남부 전쟁 이전 시대(Antebellum period)(1835~1861년)의 교회 건축은 건축가들의 가치관과 신념을 보여주는 동시에 텍사스 문화사를 보여준다.[17]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건물 모두 건축 전통, 경제적 상황, 종교적 규정,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의 미적 취향을 보여준다.[17] 이 시대의 민족 분리 운동 또한 이러한 건축의 기초에 나타난다. 그러나 각 지역의 교회는 고유한 지역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다양한 종교 집단으로 인해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물리적 외관은 지역마다 크게 다르다.[17]

미국 남서부, 특히 캘리포니아 해안 지역의 많은 가톨릭 교회들은 캘리포니아 스페인 선교지(Spanish missions in California)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미션 리바이벌 건축(Mission Revival architecture) 양식의 외관 요소를 사용하여 건축되었지만, 종종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더 현대적인 내부 요소가 추가되었다.

7. 6. 노르웨이

노르웨이에서는 특히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목재가 선호되는 건축 자재였으며, 이는 교회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7] 중세 시대 노르웨이의 모든 목조 교회는 주심 교회 기법으로 건설되었지만, 석조 건축물은 271개에 불과했다.[8] 종교 개혁 이후 새로운 교회 건축이 재개되었을 때 목재는 여전히 주요 건축 자재였지만 통나무 기법이 주류가 되었다.[9]

통나무 건축은 가볍고 종종 높은 주심 교회와 비교하여 더 낮고 견고한 건축 양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통나무 건축은 특히 높은 창문으로 잘라낸 경우 길고 높은 벽에는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졌다. 횡단부(트랜셉트)를 추가하면 통나무 기법의 안정성이 향상되었으며, 1700년대에 십자형 평면도가 널리 사용된 이유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구 올덴 교회(1759년)는 허리케인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건물을 대체한 것으로, 1759년 교회는 가장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십자형 모양으로 건설되었다.[10]

통나무의 길이는 벽의 길이를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11] 예를 들어 삼낭에르 교회(Samnanger church)의 경우, 통나무를 이어 붙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외각 모서리가 잘려져 직사각형이 아닌 팔각형 평면도가 되었다.[12] 십자형 건축물은 더욱 견고한 구조와 더 큰 교회를 제공했지만, 횡단부의 좌석을 위한 내부 모서리 때문에 강단과 제단의 시야가 가려졌다. 팔각형 평면도는 뛰어난 시야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넓은 신랑(네이브)을 건설할 수 있도록 견고한 구조를 제공한다. 하콘 크리스티(Håkon Christie)는 이것이 1700년대에 팔각형 교회 설계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라고 생각한다.[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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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키소스 Of the Manner in Which the Persecutors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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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Studies in Roman and Early Christian Architecture The Pindar Press
[5] 서적 Churches of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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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학술지 Kirkebygging i Norge i 1600- og 1700-årene 1991
[10] 웹사이트 County archives about Olden Church http://www.sffarkiv.[...] 200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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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The Abyssinians Praeger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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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뉴스 Architecture https://litcaf.com/a[...] 201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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